두 번의 가을, 겨울 꼬박 2년 입었을까. 서둘러 버스를 타고 약속 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빈 좌석에 앉았는데 누가 물을 엎질렀는지 엉덩이가 축축해졌다. 조심스럽게 손을 넣어 만져보는데 섬뜩한 감촉이 느껴졌다. 바짓가랑이 쪽이 엄청나게 찢어져 있었다. 때는 겨울이었고 롱패딩을 걸쳤기에 그나마 망신은 면할 수 있었다. 사실 그순간 쪽팔림보다 앞서는 건 미래에 대한 걱정이었다. 가장 좋아하는 바지였다. 장담컨데 가을과 겨울을 지나며 이 바지외에는 입어본 적이 없다. 정기연주회에 검정 바지를 입으라고 하여 그걸 입은 것이 전부였다. 핏도 마음에 들고 소재도 따뜻하여 주구장창 입고 다녔다. 그것이 바지를 대하는 나의 태도였다. 그리하여 이제부터 당장은 뭘 입을지 이번 겨울까지만 버텨줬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들로 가득했다. 결국 나는 옷장을 뒤져 인테리어 용으로 걸어둔 바지 중 가장 나은 것을 꺼내어 입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2주가 지난 며칠전 한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혹시나 찢어진 것과 같은 바지가 아직 판매중이진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아직 버리지 못한 바지의 택(tag)을 확인하고 상품의 코드를 알아내어 네이버에 검색했다. 이월상품으로 여전히 판매중이었다. 정말 감동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망설임 없이 곧장 주문을 넣었고 오늘 오전 찢어진 것과 같은 상품의 같은 사이즈의 바지를 배송받았다. 글을 쓰는 지금에도 허리의 사이즈를 늘리기 위하여 착용한 채 글을 쓰는 중이다. 근래 들어 가장 만족스러운 구매가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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