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에 제 2언어가 모국어를 따라갈 수 없는 것은 사고하는 과정의 차이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포도 사진을 보고 '포도'라고 인식한다. 만약 영어 수업에서 교사가 포도 사진을 보여준다고 해도 대부분은 '포도'라고 인식한 후 '포도=grape'라는 과정을 거쳐 'grape'라고 인식할 것이다. 즉 제 2언어는 항상 모국어를 거치기 마련이다. 이런 점에서 마치 모국어는 세관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겠다. 이는 한국에서 영어를 배우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언어의 시작은 어휘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영어 어휘를 익힐 때 단어집을 통해 익힌다. 그 단어집이란 한글과 영어로 가득하다. 그렇다면 모국어인 한글 단어를 배울 때 우리는 어떻게 했을까. 바로 그림이다. 이는 곧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뜻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미지와 언어를 매칭시키는 훈련을 했다. 그러나 외국어의 경우 모국어와 외국어를 매칭시키는 훈련이 대부분이다. 사람들은 사전도 영영사전을 보라고 말하는데 '이미지-영어'에 대한 매치가 없는 상태에서는 영영사전은 의미가 없다. 이는 영영뜻풀이를 한글을 거쳐 이해한 후 이를 통해 해당 영어 단어를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랑그, 빠롤 등 언어학에서 사용되는 많은 개념들과 이론들에 대해서 공부한다면 이에 대해 좀 더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정리할 수 있겠지만 지금의 나에게 그것까지는 필요하지 않다.
앞으로는 이미지와 한글을 관계짓는 것과 더불어 이미지와 영어를 관계짓는 것 또한 훈련할 것이다. 훈련이라고 표현하니 프로그램 같은 것이 있는 듯하나 그저 길을 다니며 사물, 현상을 바라보고 이에 걸맞는 영어 단어를 떠올리는 것이 전부다. 단, 한글을 거쳐서는 의미가 없다. 과연 동시에 두 언어를 원하는 대로 이미지와 직접적으로 관계짓는 것이 가능할 지는 잘 모르겠다. 이에 대해 생각하니 복잡해진다. 다음에 더 생각해봐야겠다.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는 말이 요즘들어 와닿는다. 만약 여러 언어를 모국어와 같이 기능하도록 사용할 수 있다면 다양한 사고의 메카니즘을 선택하여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단 모국어의 수준이 아니라 모국어와 같이 기능하여야 한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사고의 폭이 넓어지는 차원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의 사고를 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이것만큼 살 떨리는 경험이 있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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