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인지 계산대에서는 카드가 정지되고 엘리베이터 마저 순간 정전되어 깜빡이기를 반복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문득 가져왔던 물병이 없었고 되찾아 나오자 피아노 레슨 시간을 한참 넘긴 뒤였다. 연습실을 가자 덩치 큰 사람이 피아노 위에 거짓말 같이 앉아 있었고 잠시 뒤 오늘 시창청음 수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들려오는 멜로디를 거꾸로 외우려 보이지도 않는 음표들을 그려냈고 거짓말처럼 거꾸로 말하게 되었다. 돌아온 연습실에서 악보를 읽다 나왔으나 약이 필요없다는 말에 나간 걸음만큼 돌아왔다. 상당 시간 악보를 읽다 집으로 돌아왔고 가장 먼저 건조해진 렌즈를 뺐다. 밀린 빨래들을 세탁기에 전부 쳐 넣고 세제도 그에 걸맞게 넣었다. 아침에 벗어둔 안경을 찾을 수 없어 모니터 쪽으로 몸을 기울여야만 했다. 곧이어 이상한 소리가 들리더니 세탁기는 멈췄고 문은 열리지 않았다. 여전히 찾지 못한 안경 탓에 시야는 흐릿했다. 카톡으로 지금의 상황들이 '꿈같다'고 말하자 더욱 꿈 같이 느껴졌다. 오늘 하루 대체 뭘 한 건지 알 수 없었고 순간 <시든다>는 말이 떠올랐다. 작년 이맘때와 어떻게 이리도 똑같을 수 있는지 화까지 나려 했다.. 이 글의 끝을 맺고 있는 지금에 망할 세탁기는 다행히 끝까지 돌아갔고 때가 되어 멈춰섰다. 하지만 나는 오늘 하루 대체 뭘 한걸까. 정신이 팔리는 것은 좋다만 그것이 전부로 끝나는 허무함은 전부 내게로 돌아온다. 채 피기도 전에 시들어버릴 허무를 더이상 겪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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