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경이롭게 다가오는 것들 중 하나는 단연 신체(身體)다. 그 중에서도 감각기관은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사치의 끝이다. 사고작용의 주체가 뇌라고 할 때, 그 확장과 깊은 연관을 가지는 것이 바로 감각기관이다. 단적인 예로, 음악가의 꿈속에서는 끊임없이 음악이 흐르고 소믈리에의 꿈속은 맛과 향으로 가득하다. 평소 잘 사용하지 않았던 감각들은 꿈속에서마저 그 자취를 감추기 마련이다. 많은 이들의 꿈속은 몇 마디의 말과 시각정보만이 가득하고 그마저도 불분명한 형체이거나 색채가 없는 경우도 많다. 나의 경우에도 음악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자 꿈속에서 음악이 흐르는 경우가 잦아졌다.
감각 중에서도 시각에 관해서 더욱 얘기를 해보고 싶다. 영화 <감시자들>에서 설경구의 물음에 대해 한효주가 기억하지 못하겠다고 하자 그는 '너는 분명히 그것을 봤다'라고 단언하며 함께 기억을 되짚어본다. 나 역시도 언젠가부터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분명히 봤을 것이란 전제하에 기억을 되짚어보는 것이다. 이는 감각기관과 뇌의 기능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것인데 나는 다음의 몇가지 경험들을 통해서 이를 형성하게 되었다.
마치 오래된 신문과도 같이 글자가 빽빽한 줄글을 읽을 때였다. 글을 눈앞으로 가져가 읽으려고 하자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들이 있었다. 처음에는 대체 그것들이 뭔지 몰랐다. 그러다 그 글을 읽어보면 조금 전 떠올랐던 단어들이 어김없이 그 글 속에 박혀 있었다. 또다른 예는 자전거를 탈 때 겪는 것인데, 도심속 빌딩숲 사이의 자전거 길을 달리다보면 나도 모르게 갑자기 고개를 쳐들고 어느 고층 아파트의 한 집을 응시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럴때면 어김없이 그 창가에서는 한 남자가 담배를 피우고 있거나 여자가 빨래를 널고 있었다. 이같은 현상은 지금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으며 그 경우가 점점 빈번해지고, '떠오르고' '느껴지는' 강도는 강해지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정말로 기억을 되짚어볼 일이 있었다. 몇 년 전 그 자리에 바로 네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몇 주에 걸쳐 운영됐고 소규모의 인원이었음에도 서로간 교류가 없었던 터라 그때만 해도 널 알지 못했고 의식하지도 못했다. 그랬기에 당시 그 자리에 네가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 나 또한 그 자리에 있었고, 스치듯이 몇 번이라도 봤을 것이라 생각하며 기억을 되짚어봤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그 자리에 있는 너를 기억할 수 있었고 정말 말이 안 되게도 옷차림과 분위기, 체형, 의자에 앉은 자세까지 기억할 수 있었다. 그건 정말이지 경이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