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 중 하나는 삼촌의 죽음을 장례식 조차도 끝난 한참 후에야 내게 알렸다는 것이다. 그순간 따져묻고 싶었지만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고자 하는 의도가 빤히 보여 그럴 수 없었다. 늦게서야 소식을 전해들은 나는 무덤덤했다. 그저 당장에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것에 너무 어이가 없었을 뿐이다. 실족사라는 표현으로 처음 얘기를 꺼냈던 것 같은데 얘기를 계속 들어보니 자살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놀라지 않은 것이다. 한 달 전쯤 만났던 삼촌의 얼굴은 지금에 전해들은 얘기와 놀랍도록 부합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일을 전후로 나를 대하는 부모의 태도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그리고 이는 나의 진로에까지 큰 변화를 가져왔다. 더욱 시간이 지나 물었을 때 그들은 그 일 때문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건 거짓처럼 들려왔다. 나는 그들이 죽음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자살할 것이라고는 절대 생각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나조차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모습이 그들의 목소리와 말에서는 역력했다. 그들은 삼촌의 자살이 나에게 어떠한 영향, 기폭제가 될까 두려웠던 것이다.
부모와 내가 닮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별로 없다. 어렸을 때는 부모를 닮아 성실하다는 말을 꽤 들었는데 어째선지 그 나이에도 그건 내 성격이 아니라 가르침 받은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한 생각은 커가면서 점점 강해져 교육받아 만들어진 모습과 생득적인 것을 철저하게 분리해서 바라보는 버릇이 생겼다. 학교와 부모로부터 교육받아 학습된 많은 것들은 마치 외투를 걸친 것과도 같았다. 그것은 나의 모습을 형성하는 일부였지만 나와는 다른 것이었다. 고등학교를 2년 정도 다닐 무렵 그러한 옷들이 나와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리고 대학에 온 후로 나는 찢어발기듯 그 옷들을 벗어던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부모와 나는 더욱 달라보였다. 공통점을 찾기란 힘들었다. 그들은 내가 이제껏 입어오던 옷 그 자체였다. 그리고 또다시 시간이 흐르고 나는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혹시 그들은 여전을 옷을 걸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부모와 닮았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데 삼촌과 고모와 내가 닮았다는 생각은 커가면서 종종 하게 됐다. 어떠한 행동습관, 분위기, 말투 등이 닮았다고 느낄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꽤나 걸친 것이 없는 모습이었다. 혹, 그것이 핏줄이라고 하는 선천적인 것이라면 나의 아버지 또한 그러한 모습을 가지고 있을텐데 왜 전혀 보이지 않는 걸까. 혹시 의식적으로 옷들을 껴입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정을 이루기 위해? 자식을 위해? 그것이 사실이라면 너무나도 끔찍하다. 그들은 근 50년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조금 다른 경우라면, 옷을 걸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이다. 어느샌가 그것에 동화되어 자신의 성격으로 믿고 살아가는 것이다. 나의 부모 세대의 많은 이들이 그렇게 살아가듯이 말이다. 어느쪽이든 불유쾌한 얘기다.
나는 친할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그 어떠한 감정도 들지 않았다. 할아버지와 나는 그렇게 친하지 않았다. 장례식장은 어느 건물의 철골구조물처럼 형식적으로 느껴졌다. 삼촌은 집안과 왕래가 적었고 그랬기에 어렸을 때의 기억들만 잔상처럼 남아있다. 그럼에도 나와 닮았다고 느껴서인지 그의 장례식장에 가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안타깝다. 할아버지 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죽음에 슬픔을 느끼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장례식장에서는 슬픔과는 또다른 감정이 분명 강하게 일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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