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삶으로 모든 생각들이 귀결되던 때여서 일까. 그때 보았던 영화에서도 기억에 남는 장면은 한 첼리스트였다. 아마도 그의 모습을 보며 '저것이 음악가다'라는 생각을 강하게 했다. 내게 음악가의 이미지란 화려한 무대에서의 모습보다는 마치 조각가 혹은 대장간의 일꾼의 모습과도 닮았다. 머릿속 형체를 향해 끊임없이 질료를 깎아 나가는 조각가, 쇠붙이를 단련코자 수천의 망치질을 반복하는 대장장이. 나는 그러한 음악가가 되고 싶었다. 마부작침(磨斧作針)과 우공이산(愚公移山)의 고사를 믿는다. 지쳐 포기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변한다. 그 변화의 순간을 만끽하는 것이야말로 자기만족의 극치일 것이다.
연습을 거르지 않는 것에 대해 혹 강박이 있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건 아니라고 답한 것이 그리 오래 되지도 않았는데 최근 어쩌면 강박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근 몇 년 만에 하루에 8시간 이상씩 꼬박 일주일을 내리 단잠을 잤다. 아쉽게도 더이상은 지속되지 않았고 또다시 베갯잇과 누운 자리는 뜨거워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단잠이 끝나던 그 날은 레슨이 있던 날이었고 스스로 지난번 레슨때보다 나아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 날이었다. 강박보다는 중독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나는 결과주의는 아니다. 다만 분명 시간을 투자하여 노력했음에도 그 결과가 그에 부합하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그 노력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판단한다. 결과는 노력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잘못된 접근과 방법은 목표달성을 위한 '올바른 노력'이라고 볼 수 없다. 그건 말 그대로 그냥 '노력'일 뿐이다. 그래서 지난 레슨처럼 분명 꾸준히 연습했음에도 스스로 더 나아진 것이 없다고 느껴질 때면 잘못된 방법으로 연습했음을 통감하게 되고 짜증이 난다. 여러 다른 기회들을 포기하고 투자한 시간과 체력이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당장의 모든 것들이 덧없어 보인다. 음악조차 때려치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감정은 바닥을 칠 때까지 내려간다. '이런 씨 내일 연습실을 가야하나 말아야하나, 어차피 지난 번과 크게 다를 것 없이 연습할 수밖에 없고 그것이 최선인데' 웃긴 것은 이런 감정 아래 내일 연습실을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하기 위해 입시 일정을 꺼내 스케줄을 계산해본다. 더욱 구체적인 스케줄을 구상하기 위해 아직 미처 들어보지 못한 곡목들을 재생목록에 추가했다. 짜증은 계속해서 미친듯이 솟구쳤다. 입시를 한답시고 이러고 있는 자신이 짜증났다. 한참을 그러다 마지막 곡목을 들을 때였다. <Breit Uber Mein Haupt>라는 곡이었고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짜증은 간데없고 행복한 기분만이 가득했다. 한시라도 빨리 이 노래를 부를 수 있기를 고대했다. 내일은 무조건 연습실을 가야했다. 병신같은 나는 그냥 음악을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