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발단은 생각보다 훨씬 이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눈에 띄게 드러난 것은 대략 2주 전부터였다.
지금 살고 있는 건물에는 경비는 없지만 건물주에게 고용된 관리인이라는 사람이 따로 있다. 많아봐야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다. 그 관리인이 건물의 계약부터 건물 상태 점검 등 거의 모든 일을 총괄한다. 이 건물은 최근 신축된 건물이다. 아마도 4월 정도에 모든 입주가 완료됐을 것이다. 그리고 신축된 건물에 따르는 당연한 문제들-주차, 쓰레기, 재활용 등의 문제들-이 발생했고 관리인은 이에 대한 안내사항을 프린트하여 엘리베이터 내에 붙여뒀다. 8층에 사는 나로서는 그 안내사항을 지겹도록 쳐다봐야만 했다. 그러다 특별할 것 없는 어느 날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그 안내문이 적힌 A4 종이들이 바닥에 전부 떨어져 있었다. 청소하는 분들께서 청소하며 떼 버렸나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나는 그것이 사건의 전조였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진짜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관리인은 안내사항이 적힌 프린트물을 다시 한 번 출력하여 엘리베이터 내에 붙여뒀다. 내용은 이전과 동일했고 흰색 A4 용지 3장에 출력되어 간격을 띄운 채 각각 네 모서리에 스카치테이프로 고정되어 있었다. 내용이 바꼈나 싶어 올라가는 동안 한참을 들여다봤지만 그대로였다. 그런데 만 하루가 채 지났을까, 엘리베이터에 올랐는데 안내문들이 조금 찢어져 있었다. 마치 길거리의 '과외 구함' 전단지들처럼 아래 부분이 오징어발 식으로 찢어져 있었다. 유치한 장난이라 여기며 픽 웃어버렸다. 그러다 또 며칠 뒤, 안내문들이 더욱 많이 찢겨져 조금은 흉측한 모습이 되었다.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장난이었다. 안내문들은 그런 지저분한 상태로 얼마간 붙어 있었다. 다음번 엘리베이터에 올랐을 때 안내문들은 다시 한 번 뜯겨져 바닥에 모여 있었다. 관리인이 새로 붙이기 위해 떼놓은 것이라 여겼다. 얼마뒤 안내문은 다시 붙여졌다. 그 내용과 붙여진 형태는 이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이제 유치한 장난은 그만뒀으면 했다.
안내문이 또다시 찢겨져 있었다. 이제 상황은 심각성을 띄기 시작했다. 무딘 칼로 그어버리듯 종이는 대각으로 크게 찢겨져 있었다. 그것은 누가보더라도 보란듯이 찢어 놓은 것이었다. 나는 혀를 차고 인상을 찌푸렸다. 이제 매번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종이는 심각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이틀을 마다하고 찢겨진 종이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하루는 가스 검침을 나온 아주머니께서 아주 기겁을 하셨는데 오전 내내 집에 있었던 나는 또 그리 되었냐며 아주머니를 타일렀다. 하지만 직접 눈으로 본 광경은 생각했던 것보다 잔혹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나는 순간 단두대를 떠올렸는데, 종이들이 난도질 당한듯 찢겨져 바닥의 정중앙에 쌓여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아니었다.
나는 이제 관리인이 어떻게 나올 것인가가 무척 궁금해졌다. 건물의 현관과 주차장에는 여러대의 cctv가 설치되어 있지만 엘리베이터를 비추는 카메라는 한 대도 없었다. 그건 매층의 복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관리인은 그것이 누구의 소행인지를 이미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입주 초부터 입주자들로부터 말이 많았던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개를 키우는 여자가 그랬고 여러 명이 합숙하는 듯한 학생들이 그랬다. 지금까지 보아온 관리인의 성격으로 봐서는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지금까지 다른 말없이 안내문을 꿋꿋하게 붙여온 것이 놀라울 뿐이다. 그녀는 잘 웃고 친절한, 다시말해 서비스 정신이 훌륭한 관리인이었지만 문제사항에 대해선 까칠하게 반응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의 행동은 인내라기보다는 시험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며칠간 부산에 들렀다 서울로 돌아왔다. 집 주위에 공사중이던 건물들의 층수가 눈에 띄게 올라가 있었고 그 외에는 딱히 변화가 없어보였다. 전봇대 앞에 쓰레기 봉투를 두지 말라고 그렇게 말해도 여전히 몇 개의 쓰레기 봉투가 있었고, 주차는 현관 출입문을 고려하지 않은 채 제멋대로였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때까지만 해도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놀랍게도 엘리베이터 안은 변화가 있었다. 안내문의 내용이 조금 수정되고 글자 크기라든지 밑줄 따위가 바뀌어져 있었다. 물론 새로운 내용이 추가 된다거나 하는 큰 변화는 아니었지만 나는 뭔가가 변하고 또 뭔가가 시작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그 생각이 틀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8층의 엘리베이터 옆으로 또다른 안내문 하나가 붙어 있었다.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것이며 아마도 매층마다 붙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범인을 특정하기 위한 장치였다.
관리인은 생각보다 무서운 사람이었다. 관리인이 생각한 범인의 심리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주위 입주자들로부터 매번 항의가 들어올 때마다 관리인은 그 해당 호수의 입주자에게 다른 입주자들의 항의 내용을 전달하며 주의해줄 것을 강하게 요구했다. 그러한 일이 반복되다 보니 해당 입주자와 관리인의 사이가 무척 나빠졌고 대놓고 싸우지는 않았지만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을 것이다. 어느날 엘리베이터에 안내문이 붙자 해당 입주자는 그 안내문이 꼴보기 싫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안내문의 아래에는 빠짐없이 관리사무소라는 말이 달려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관리인에 대해 간접적인 해코지를 하는 것과도 같았기에 범인은 매번 안내문을 찢어버리는 소행을 벌였다.
하지만 관리인은 무서울 정도로 침착하고 영리했다. 아마 범인은 앞으로도 엘리베이터 안의 안내문은 계속해서 찢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밀폐된 엘리베이터와 달리 쉽사리 눈에 띄는 각 층의 안내문에는 쉽게 손대지 못할 것이다. 범인은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는 것을 관리인은 알고 있었다. 안내문을 쳐다보는 것 자체가 범인에게는 상당한 스트레스이기 때문이다. 즉, 관리인은 문제의 해결보다도 범인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한 것이며 그러한 점에서 관리인은 무서운 사람이다. 만약 그녀가 더욱 잔인한 사람이라면 각 호의 출입문 옆마다 안내사항을 붙이기 시작할 것이며 점차 그 갯수를 늘려갈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는 가지 말았으면 한다. 범인이 가면을 벗고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에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새삼스레 참으로 이상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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