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것 모두를 걸고 내기를 할 수 있는 호기를 가졌으면 했다. 그건 무척이나 강해보였다. 모든걸 내려놓고 미련이 없다면 가능할 것이라 여겼다. 미련이 없다면 두려움 또한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정말로 언젠가부터 인간으로서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삶이란 것에 조차 미련이 없게 되었다. 그러자 시간은 더뎌지고 모든 것의 형체와 경계는 희미해졌다. 두려움은 사라지고 마음은 편해졌다. 이로써 강해진 것이라 여겼다. 모든 것들은 가지 끝에 걸린 흰색 천 조각과도 같았다. 바람에 흔들리다 날아간들 붙잡을 생각은 없었다.
조금전 한 영화를 봤다. 하늘이 보이는 지하 감옥. 탈출을 위해서는 지상으로 연결된 거대한 원형 벽을 기어올라야만 했다. 많은 이들이 탈출을 시도하나 실패한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한 남자도 탈출을 시도한다. 허나 그 역시도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그를 지켜보던 노인이 말한다. 당신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저 벽을 오를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을 가장 강력히 이끄는 욕구,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살아남고자 하는 바람, 그것이 없기 때문에 당신은 나약한 것이다. 노인의 말에 나는 혼란스러웠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남자의 모습은 나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정신없는 생활을 원하는 건 아니지만 항상 치열하게 살고 싶었다. 치열함과 안락함은 공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것이 곧 호기라 생각했다. 그러나 돌이켜봤을 때 언젠가부터 오직 안락함만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고 삶에 대한 미련도 없어진 시점과 맞물려 있었다. 모든 것은 안락함으로 나아가는데에 족쇄처럼 느껴졌기에 그 어떤 것도 가지지 않으려 노력했다. 위신, 권력, 부와 같은 사회적 가치들에서부터 심지어 사람들까지도. 이로써 때때로 해방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에 생각하길 그것은 강인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태하지는 않았으나 치열하지도 않았고 나약함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이미 가지고 있던 것들, 그리고 가지게 된 것들을 지켜나가는 것이 진정 강한 것임을 지금에 새삼 느낀다. 앞으로도 불필요하거나 넘칠 정도의 것을 가지려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더이상 해방과 안락이라는 명목 아래 간절히 바라는 것들마저도 애써 져버리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며, 지키고 싶은 것을 내 손으로 지킬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반드시 살아남을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사회적 위신, 부, 권력 따위가 필요하다면 그들을 획득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당장에는 잘 안 되겠지만 두려워하는 마음도 조금은 가질 것이다. 후에 나이 먹고 어느 한적한 곳으로 들어가 지낼지는 몰라도 당장에 신선놀음할 생각은 없다. 너무나도 당연한 얘기들이지만 이렇게 한바퀴를 돌아보고 난 뒤에야 비로소 씹고 내뱉을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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