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날씨에 뿌옇게 흐린 창, 그 너머로 비춰오는 따뜻한 햇살, 그 빛을 받고 자라나는 초록의 식물들. 잔잔하며 소박한 가사가 떠오르는 더딘 시간의 풍경. 그러나 더이상. 초록빛의 식물은 없다. 그들은 성장을 멈추고 영원히 정지했다. 그건 곧 죽음을 의미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찍혔던 그들의 사진은 이제 그들의 영정사진이 되었다. 나는 최소한의 예를 지켜 사진의 색을 뺐어야만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 그들은 전부 죽었다. 바로 얼마전까지 자라나던 녀석도 죽었다. 전부 죽었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하다. 저들이 죽었던 당시에도 그랬고 '죽었다'는 말을 연달아 타이핑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아무런 느낌이 없다. 씨앗을 심고 물을 주며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그들을 볼 때면 신기하고 뿌듯했지만 정작 시들어 죽어버린 모습에는 이상할 정도로 무심하다. 그들이 죽게 됨에 따라 나는 그들의 땅과 그들의 몸뚱아리를 검은 비닐에 털어버리고 그것의 매듭을 짓고 흙 뭍은 손을 털어낼 뿐이다. 그것으로 모든 연緣을 끝낸다. 내게 식물이란 그런 존재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소홀한 건 아니다. 물론 그들의 죽음에는 나의 잘못이 있겠다. 그러나 그들을 열심히 키웠다 감히 말할 수 있다. 단지 그들의 죽음에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을 뿐이다. 처음 녀석들을 들여올 때의 꽃집 아줌마, 아저씨의 당부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으며, 죽어가는 녀석들을 살리기 위해 노력도 했다. 그러나 안 되는 건 안 되더라. 그리고, 난 그들이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죽어가는 그들을 보며 '얼마나 아플까', '얼마나 괴로울까' 따위의 말을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슬픔과 같은 감정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감정의 전이를 통한 일정 수준의 공감 정도인데 그들은 내게 그 무엇도 전하지 않는다. 그들이 멋진 모습을 뽐낼 때 느끼는 아름다움, 잘 자라날 때의 뿌듯함은 그들을 헤아린 것이 아니라 그저 나 자신의 감상일 뿐이다.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정상적이라고는 말하지 못하겠으나 비정상적이라고도 말하지 못하겠다. 이는 내가 동물은 키우지 못하면서 식물은 키울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릴적부터 애완동물을 키우고 싶었다. 그러나 걸음마하던 시절의 어항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집안에 인간 이외의 생명체가 있었던 적은 없다. 키우고 싶다며 매일을 떠들어댔지만 정작 거부하는 것은 자신이었다. 죽어가는 그들의 모습을 볼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아파하고 야위어가는 그들의 모습을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그건 생각만으로도 너무 고통스러웠다. 내게 그들은 '수명 짧은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얼마전 이런 말을 들었다. '반려동물이라는 말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함께할 짝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그 삶이란 딱히 사람의 삶을 뜻하는게 아니다. 그 동물이 죽는 순간까지 사람이 옆에서 함께 해주는 것이다.' 그러한 말을 들었다. 그 말에 참으로 스스로가 겁쟁이처럼 느껴졌고 동시에 애완동물을 키우는 이들이 대단해보였다. 어쩌면 나의 이러한 태도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일지 모르겠다. 툭하면 아프다는 사람은 어딘가 마음에 안 든다. 건강해보이는 사람은 엄청 좋아한다. 말로는 '건강해야 많은 것을 함께할 수 있지'라고 하지만 실은 아파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두려운 것일지도 모른다. 참으로 비겁하다. 그러나 한 사람에게 끌린다는 건 의도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 따위가 아니라 당최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것이기에, 사람간의 관계에 있어 이러한 두려움은 '다행히도' 뒷전이 된다.
글을 마치려니 문득 예전 한 대학의 잔디밭이 생각난다. 나무들도 많고 잔디밭도 많은 학교였다. 그래서 평일에도 주말에도 사람들이 아이들과 함께 이곳으로 소풍을 즐겨 오는 듯 했다. 그 학교에는 커다란 잔디밭이 하나 있었다. 그 잔디밭의 테두리를 따라서는 무릎 정도 높이의 줄로 이어진 낮은 울타리가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곳곳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의 팻말이 서있었다. '잔디가 아파하니 들어가지 마세요^_^' 아이들을 위한 팻말일 것이다. 난 그것들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만약 정말 아픔을 느낄 수 있다면 밟히는 게 아플까 칼날에 잘려나가는 게 아플까'. 그 잔디는 얼핏 보기에도 매우 관리가 잘 된 잔디였기에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매우 못마땅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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