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싫어하고 있었다. 되풀이 되는 실망 속에서 그래도 희망은 시간 속의 사람들이라 여겨왔지만 어느새 싫어하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오늘 처음 만난 이에게조차 기대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봤다. 기대가 없는 곳엔 시작도 없었다. 알아가고, 나를 보여주려는, 어떠한 노력도 없었다. 냉소적인 마음만이 자리 했다. 아무래도 조직에서의 오랜 생활에 지친 것 같았다. 그곳에서는 무엇과도 관계되기 싫었다. 눈을 뜨고 있어야 한다면 천장을 응시하거나 창밖 풍경에 시선을 돌렸다. 뭔가 해야겠다 싶으면 책에 묻혀 활자만을 따라갔다. 그런 하루 끝에 누구보다 먼저 눈을 감았다. 1년이 넘는 시간동안 이어진 생활이다.
올해 여름에는 잠시동안 다른 곳으로 파견을 나가게 됐다. 일터가 바뀌고 덩달아 함께하는 사람들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 지 어느덧 한 달이 다 되어간다. 요즘 나는 부쩍 말이 많아졌다. 갑자기 할 말이 늘어난 건 아닌데 말을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든다. 일상의 대화들이 오가고 때때로 시시한 농담마저 던진다. 처음에는 몇 사람과만 그랬는데 이제는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그렇다. 다시금 입을 연다는 건 내게 회복의 신호와도 같았다.
처음엔 그렇게 다르지 않았다. 인상이 좋긴 했지만 그런 사람들은 많다. 부쩍 격없이 느껴졌던 건 세 사람이 함께 머물 때였다. 두 사람은 본래 친한 사이였는데 그들 사이에서 나는 왜인지 그들의 관계를 공유할 수 있었다. 대화는 이리저리 튀었는데 대화의 온도는 듣는 이와 관계없이 모두 따뜻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만약 우리에게 말이 없었다면 이건 마치 그들이 나누는 따뜻한 차를 불쑥 내 잔에도 덜어 온기를 함께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나는 이방인이 아니었다. 셋 중 한 사람이 떠난 후에도 우린 여전히 따뜻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어린시절 새로운 친구를 사귈 때의 모습이 꼭 이랬다는걸 뒤늦게 깨달았다.
가족을 많이 아끼는 다정다감한 사람이 있다. 이따금 어린 아들과 영상통화를 하는데 곁에 있는 나마저 함께 즐거워진다. 엿듣던 내가 이것저것 물어보면 '우리 아들이라 이렇게 얘기하는 건 아닌데~' 하며 얘기가 시작되는데 그들의 서로에 대한 감정을 살짝 엿보는 것 같아 마음이 따뜻해진다. 하루는 에어컨 바람에 대해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때는 여름이고 일하는 곳은 에어컨 없이 버틸 수 없는 곳이다. 내 자리는 에어컨과 가장 가까웠고 유독 그날따라 바람이 정면으로 쏘아대서 추웠다. 혹시 당신은 춥지 않냐고 물어보고 몇 마디 나눈 것이 전부였다. 그날 뒤로 에어컨 날개는 항상 천장을 향해 있었다.
한번 스치고 지나는 이에게조차 인사를 건네는 자신이 될 줄은 몰랐다. 편의점 알바와 식당의 주인들, 매번 바뀌는 버스의 기사들까지. 이제는 그들에게조차 말을 걸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사람으로 말미암은 문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풀려났다. 새롭게 만난 좋은 사람들은 다시금 기대하는 마음을 품도록 했다. 그들은 천하태평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제각기 풀리지 않는 고민과 걱정을 안고 살아가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단지 그들은 마음이 따뜻한 쪽으로 조금 기울어져 있는 사람들이었다. 적당한 때에 나타나 준 그들에게 고맙다. 무엇보다도,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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