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엔 늘상 후회처럼 질질 끌려오는 생각들이 있다.
이건 정말 합리적이라고 아침을 나섰던 논리들은 하루의 끝에선 보기 좋게 꼬리를 내리곤 했다. 오늘은 한 마디 말이 문득 떠올랐다. 아니, 그보다도 앞서 나는 오늘도 사지 못한 옷 걱정을 하며 걷고 있었다. 가게와 빌딩의 창들에 번갈아 비치는 내 모습들은 너무도 멋없이 느껴졌다. 옷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래토록 아껴 입는 것만이 잘하는 것이 아니라고 몇 번이나 되뇌이며 다음번엔 꼭 옷을 사러 가리라 마음 먹었다. 바로 그때 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입을 옷이 너무 없어. 쇼핑을 한 게 언제인지 모르겠어.'
오랜시간 시험 공부를 하는 그녀는 갈수록 여유가 없었다. 시간 뿐만이 아니라 각종 인강비·식비·교통비는 그녀의 씀씀이마저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그녀는 나보다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쓰는 사람이다. 나라고 옷에 지출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편하고 만족해버리면 끝이다. 그러나 그녀는 달랐다. 도수 높은 알 두꺼운 안경은 사람들 앞에서 죽어도 쓰기 싫다고 잠들지 못한 뻑뻑한 눈에 뻑뻑한 렌즈를 집어넣는 사람이다. 그런 그녀가 입을 옷이 없다고 느꼈을 때 그 기분은 어땠을까. 거리의 창에 잊혀질만하면 또다시 나타나 비치던 초라한 내 모습, 그 받아들이기 싫은 모습의 몇 배를 뛰어넘는 자신의 모습을 그녀는 그순간 되돌아본 것은 아니었을까.
많이 슬프진 않았을까 생각했다. 혹시 그 자리에서 울지는 않았을까. 그 말을 들었던 당시의 나는 대체 왜 그 말의 무게를 전혀 헤아리지 못했던 걸까. 그녀는 너무 솔직한 것은 싫다고 했다. 솔직함이 최선이라고 여기는 나는 이번에는 또 어떤식으로 그녀에게 내가 느낀 것들을 전해줘야할 지 확신이 서질 않는다. 걱정하는 마음마저 날카롭게 깎아 그녀에게 건네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복귀 시간이 다가오자 주위는 어둑해졌다. 가로등에 비쳐 바닥으로 내떨어진 내 그림자가 유독 짙어 보였다. 짙은 그림자는 나의 과오처럼 느껴졌다. 조금 옅어져 보는건 어떨까 생각했다. 솔직한 것도 좋지만 조금 더 친절한 사람말이다. 익숙해진 부대 생활 속에 느끼지도 못할 정도의 아주 느린 속도로 천천히 그녀에게조차 친절함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짚어봤다. 그렇게 질질 끌려오는 생각들과 함께 나 역시도 무언가에 질질 끌려가듯 오늘도 부대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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