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돌아온 여름
오늘이 며칠인지를 세어보며 장마를 기다린다
8월의 무성한 풀들 위로 쏟아지던 큰 비-
한낮의 쉼없이 내리치는 빗줄기와 옅게 깔린 안개들,
첨벙거리는 물웅덩이와 우산을 뚫어내는 소리들
그 요란 속에 세상은 되려 고요해지곤 했었다
유예하고 싶은 무언가 있을 때 장마를 기다렸다
그 무언가가 무언지는 늘상 애매했으므로
어두운 방 혹은 이불 밑으로 숨어들곤 했으나
왜인지 요즘은 당당히 나날의 하늘을 살핀다
바라는 건 어쩌면 순수한 여름날의 장마
<빗 속의 자신을 그려보세요>라고 말했고,
종이와 크레파스는 쓰여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가장 먼저 우산 든 남자를 그렸고, 그 위로
거센 비를 내리게 했고, 그 옆으로 바다를 그렸다……
<아 이건……>라고 설명해줬지만 금새 잊어버렸다
장마가 시작되는 정오의 한 가운데로 뛰어든다
거세게 내리는 비와 우산, 그 옆으로 펼쳐진 바다
언젠가 한번 그려졌던 풍경들, 그 속에서 말한다
<내가 느꼈던 고요를 너에게도 보여주고 싶었어>
미묘하게 달라진 풍경, 다시 그린다면 달라질 그림
어김없이 돌아온 여름이 여느 때와는 사뭇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