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끝은 저래야지'라며 결말에 수긍했던 드라마는 손에 꼽힌다. 대표적으로 나쁜남자(2010)와 하얀거탑(2007) 두 작품 정도. 두 작품 모두 주인공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다. 끝이라는 것의 무게를 감당할 만한 것은 결국 죽음 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 외에 다른 결말이 그 자리에 놓였을 때 기분이 꺼림칙하다. 두 작품의 결말은 너무나도 좋았다. 마음이 아팠으나 그 후에는 너무나도 시원했다. 그들은 여운을 남겼고 그렇기에 방영이 끝난 뒤에도 드라마는 계속 되었다. 이야기가 끝을 향해 달려갈 무렵부터 그들이 죽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왜 죽음으로써 끝을 맺어야지만 비로소 완전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죽음의 반댓말은 뭘까. 죽음이 끝과 같은 것이라면 죽음에 대치되는 것은 시작과 같은 것이 되어야할 것이다. 출생? 탄생? 그러나 출생과 죽음, 탄생과 죽음이라는 표현보다는 삶과 죽음이라는 표현이 통용된다. 그런데 삶이라는 말은 어떤 한 시점時點을 의미하기보다는 시간時間적 개념에 가깝다. 때로는 죽음의 순간까지를 아울러 말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왜 삶과 죽음이라는 말을 쓰는 걸까. 어쩌면 이는 서로 대치되는 개념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둘을 통해 더 큰 하나의 개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마치 '동물과 식물'이라는 표현에서 생명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내가 느꼈던 완전함은 곧 '인생' 그 자체에 대한 감흥이었다고 볼 수 있다. 내게는 삶을 살아가는 모습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이다. 삶과 죽음이 한데 놓여있을 때에 비로소 '인생'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드라마의 한 편 한 편보다는 전편을 다 보는 것에 더욱 힘을 쏟는 모습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몇 년 전부터 순간 순간의 소소한 것들로부터 일어나는 감정들에는 홀대하고 있음을 느꼈다.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곳은 현실이며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라는 것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항상 바라보는 것은 현실 그 너머에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현실에서 다가오는 순간 순간의 감정들은 저 너머로 향하는 데에 걸리적거리는 장애물로 다가왔다. 나를 지체하게 하는 일말의 여지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랬기에 지금껏 이 같은 태도를 고수해왔다. 한 번 멈추기 시작하면 곧 이에 익숙해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벌써 지쳐버린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이제는 잘 모르겠다. 지금과 같은 태도를 고수하는 것이 최선인지 확신할 수 없다. 이러한 모습은 나약해진 걸까 아니면 더욱 강해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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