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ssignment
Subject : The reason for studying the social welfare
Class : Social Work Practice Theory (Prof. Choi Mun-Jung)
Date : March 30, 2012
한 사회복지 전공 수업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심리학을 공부하는 이들 중 다수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부를 한다.’ 내가 사회복지를 전공으로 선택하게 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문제’라는 것에는 다양한 차원이 있을 수 있고 나의 경우에는 결핍의 문제였다. 나는 이를 대리만족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이를 위한 수단으로 선택한 것이 사회복지였다.
내게 사회복지는 1지망 학과가 아니었다. 사회학에 관심이 있기는 하였으나 더욱 하고 싶었던 것은 음악 전공이다. 그러나 음악에 대한 관심은 고등학교 중반이 되었을 때부터 시작되었고 주위의 이들은 이에 대해 ‘늦었다’는 평과 함께 나를 만류하는 데에 온갖 힘을 썼다. 부모가 바라는 자식상像과 자식이 바라는 부모상, 그 지점에서 갈등이 심화됐고 어느 쪽도 양보하지 않았다. 부모의 금전적 지원 없이는 준비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결국 음악에 대해 ‘잠정적 보류’하기로 결정한다. 주위의 이들은 이러한 ‘잠정적 보류’를 그들의 뜻에 대한 ‘암묵적 동의’로 해석했다. 내게는 그렇게 ‘결핍’된 공간과 시간이 생겨났다. 사회복지에 대한 관심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고통 받는 나’에 대한 생각은 ‘고통 받는 청소년’으로 확대되었다. 청소년으로서의 일상생활은 사회복지에 대한 강한 동기를 유발했다. 현실의 모습은 이상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현실에서 살아가며 바라보는 것은 언제나 현실 그 너머의 이상이었다. 그리고 그 이상이란 지금 서있는 현실과 닿아있는 종착역이 아니라 전혀 다른 길 위에 있었다. 그렇기에 눈앞의 모든 것들은 저 너머의 이상으로 향하는 데에 걸림돌이고 장애물이었다. 학교는, 입시성적을 최우선 평가기준으로 하는 것과 같은 실용성을 추구하는 동시에 수업시간에는 담당교사의 수업을 반드시 들어야만 한다는 학생으로서의 도리를 내세웠다. 당시만 하여도 학교에 상담교사 따위는 없었다. 감정과 생각들은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넘쳐나는 데 이를 토로할 공간은 없었다. 그 누구도 이야기를 들어주려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이야기를 들어줄 만한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주지도 않았다. 그들은 마치 당근으로 당나귀를 유인하듯 우리가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는 데에 필요한 정보만을 끊임없이 던져주었다. 다음 세대의 청소년들은 나와 같은 고통을 느끼지 않기를, 넘쳐나는 열정과 힘을 감정싸움에 소모하지 않기를 바랐다. ‘사회복지를 공부하면 그러한 환경을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대학 전공으로 사회복지학을 선택했다.
그러나 대학생이 되고 원하는 사회복지학과에서 공부하게 되었을 때 사회복지학에 대한 관심은 점차 줄어들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것은 내게 사회복지는 결국 수단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목적은 어떤 일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하지만 목적에 대한 수단은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었다. 고등학생 때 시작된 결핍을 해소할 수단은 얼마든지 많았다. 꼭 사회복지가 아니어도 괜찮았다. 게다가 대학은 고등학교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느껴질 만큼 고등학교 생활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대학생이 되면 시간이 많아진다’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대학이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그 많은 시간이란 대학을 다니든 말든 원래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대학에 와서도 진로에 대한 부모님과의 의견 차이가 좁혀지지 않았고 당장의 학교 생활에 집중할 수가 없어 후에 재입학을 하기로 부모님과 약속하고 자퇴했다. 그만큼 수단으로서의 사회복지란 가벼운 것이었다. 원했던 활동을 하고 생각도 많이 하며 그렇게 1년의 시간을 보내고 학교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친구가 거의 매일 대리출석을 해주다시피 하고 시험도 치르지 않아 소수점 차이로 학사경고를 면하며 근근이 1학년을 마쳤다. 소속은 서울시립대학교였으나 이는 나의 준거집단이 아니었다. 학교를 다니면서도 자퇴했을 당시와 마찬가지로 여러 활동, 잡다한 책, 생각에 빠져있었다. 그 무엇이든 결국은 ‘나’에 대한 문제로 귀결되었고 상당수는 진로에 관한 것이었다. 이러한 방황의 흐름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반복되는 방황 속에 불안함은 커져갔다. ‘시간 소모를 하고 있는 것일까’, ‘평생을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이대로 괜찮은 걸까’ 스물 셋이면 아직 팔팔해야 할 것 같은데 때때로 뒤를 돌아보았을 때 한숨이 나오고 힘이 빠진다. ‘첫마음의 길을 따라 / 한결같이 걸어온 겨울 정오 / 돌아보니 고비마다 굽은 길이네(박노해, 첫마음의 길)’ 만약 인생이라는 것이 산을 오르고 내려오는 것과 같고, 그 올라갈 때의 노력과 내려올 때의 환희의 정도가 같은 것이라면 애초에 산을 오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생각한다. 생각과 감정의 정리 - 학생상담센터에서의 상담, 자우림(김윤아)의 음악, 쉼보르스카의 시, 끄적거리는 글 - 와 망각 - 테니스, 노래 - 의 균형을 맞춰가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2012년 1학기가 시작된 지 한 달이 되었고, 스물 셋이 되었지만 여전히 나는 아는 게 없다. 사회복지를 공부하는 이유는 증발해버렸고, ‘사회복지를 공부하는 나’는 수업시간에만 가끔 존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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