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p
선운사에서 -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간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76p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 정희성
어느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 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
외롭게 긴 기다림 끝에
어느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176p
내가 만약 촛불을 밝히지 않는다면 - 나짐 히크메트
내가 만약 촛불을 밝히지 않는다면,
당신이 만약 촛불을 켜지 않는다면,
우리가 만약 촛불을 밝히지 않는다면,
이 어두움을 어떻게 밝히 수 있는가?
200p
젊은 시인에게 주는 충고 - 라이너 릴케
마음속의 풀리지 않는 모든 문제들에 대하여
인내를 가지라.
문제 그 자체를 사랑하라.
지금 당장 해답을 얻으려 하지 말라.
그건 지금 당장 주어질 순 없으니까.
중요한 건
모든 것을 살아 보는 일이다.
지금 그 문제들을 살라.
그러면 언젠가 먼 미래에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삶이 너에게 해답을 가져다 줄 테니까.
218p
비망록 - 문정희
남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남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가난한 식사 앞에서
기도를 하고
밤이면 고요히
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구겨진 속옷을 내보이듯
매양 허물만 내보이는 사람이 되고 말았따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내 가슴에 아직도
눈에 익은 별처럼 박혀 있고
나는 박힌 별이 돌처럼 아파서
이렇게 한 생애를 허둥거린다
232p
먼 행성 - 오민석
벚꽃그늘 아래 누우니
꽃과 초저녁달과 먼 행성들이
참 다정히도 날 내려다본다
아무것도 없이 이 정거장에 내렸으나
그새 푸르도록 늙었으니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얻었으냐
아픈 봄마저 거저 준 꽃들
연민을 가르쳐준 궁핍의 가시들
오지않음으로 기다림을 알게 해준 당신
봄이면 꽃이 피는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
잘린 체게바라의 손에서 지문을 채취하던
CIA 요원 홀리오 가르시아도
지금쯤 할아버지가 되었을 것이다.
236p
방문객 -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일생이 오기 떄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242p
참 좋은 당신 - 김용택
어느 봄날 당신의 사랑으로
응달지던 내 뒤란에
햇빛이 들이치는 기쁨을
나는 보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사랑의 불가로
나를 가만히 불러내신 당신은
어둠은 건너온 자만이
만들 수 있는
밝고 환환 빛으로
내 앞에 서서
들꽃처럼 깨끗하게
웃었지요
아, 생각만 해도
참
좋은
당신.
246p
안녕, 피츠버그 그리고 책 - 김용책
안녕, 아빠.
지금 나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어.
마치 시 같다.
버스를 기다리고 서 있는 모습이
한그루의 나무 같다.
잔디와 나무가 있는 집들은 멀리 있고,
햇살과 바람과 하얀 낮달이 네 마음속을 지나는
소리가 들린다.
한그루의 나무가 세상에 서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잃고 또 잊어야 하는지.
비명의 출구를 알고 있는
나뭇가지들은 안심 속에 갇힌
지루한 서정 같지만
몸부림의 속도는 바람이 가져다준 것이 아니라
내부의 소리다. 사람들의 내일은 불투명하고,
나무들은 계획적이다.
정면으로 꽃을 피우지.
나무들은 사방이 정면이야, 아빠.
아빠, 세상의 모든 말들이
실은 하나로 집결되는 눈부신
그 행진에 참가할 날이 내게도 올까.
뿌리가 캄캄한 땅속을 헤집고 뻗어가듯이
달이 행로를 찾아 언 강물을 지나가듯이
비상은 새들의 것,
정돈은 나무가 한다. 혼란 속에 서 있는 나무들은
마치 반성 직전의 시인 같아. 엄마가 그러는데
아빠 머릿속은 평생 복잡할 거래.
머릿속이 복잡해 보이면
아빠의 눈빛은 집중적이래.
아빠,
피츠버그에 사는 언니의 삶은 한권의 책이야.
책이 쓰러지며 내는 소리와
나무가 쓰러질 때 내는 소리는 달라.
공간의 크기와 시간의 길이가 다르거든.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가
높은 첨탑이 있는 성당의 종소리처럼 슬프게
온 마을에 퍼진다니까.
폭풍을 기다리는
고요한
적막을
견디어내지 못할 시간들이
앞으로 돋아나지 못할 거야.
나는 가지런하게 서서
버스를 기다려야 해.
이국의 하늘, 아빠,
여기는 내 생의 어디쯤일까?
눈물이 나오려고 해.
버스가
영화 속 장면처럼 나를 데리러 왔어.
아빠는, 엄마는, 또 한 차례
또 한 계절의 창가에 꽃 피고 잎 피는 것에 놀라며
하루가 가겠네.
문득문득 딸인 나를 생각할지 몰라. 나는 알아.
엄마의 시간, 아빠의 시간, 그리고 나의 시간,
오빠가 걸어다니는 시간들, 나도 실은 그 속에 있어.
피츠버그에서는 버스가 나무의 물관 속으 지나다니는 물 같이 느려.
피츠버그에 며칠 머문 시간들이
또,
그래.
구름처럼 지나가는
책이 되어.
한장을 넘기면
한장은 접히고
다른 이유가, 다른 이야기가 거기 있었지.
책을 책장에 꽂아둔 것 같은
내 하루가 그렇게 정리되었어.
나는 뉴욕으로 갈 거야.
뉴욕은 터득과 깨달음을 기다리는
막 배달된 책더미 같아.
어디에 이르고, 어디에 닿고, 그리고 절망하는 도시야.
끝이면서 처음이고
처음이면서 끝 같아.
외면과 포기보다 불안과 긴장이 좋아.
선택이 싫어.
아빠, 나는 고민할거야.
불을 밝힌 책장 같은 빌딩들,
방황이 사랑이고, 혼돈이 정돈이라는 걸 나도 알아.
도시의 내장은 석유 냄새가 나.
그래도 나는 씩식하게 살 거야.
난 어디서든 살 수 있어.
시계초침처럼 떨리는 외로움을 난 보았어.
멀고 먼 하늘의 무심한 얼굴을 보았거든.
비행기 트랩을 오를 거야.
그리고 뉴욕.
인생은 마치 시 같아. 난해한 것들이 정리되고
기껏 정리하면 나면 또 흐트러진다니까. 그렇지만 아빠.
어제의 꿈을 잃어버린 나무같이
바람을 싫어하지는 않을 거야.
내 생각은
멈추었다가 갑자기 달리는 저 푸른 초원의 누떼 같아.
그리고 정리가 되어 아빠 시처럼 한그루 나무가 된다니까.
아빠는 시골에서 도시로 오기기까지 반백년이 걸렸지.
난 알아, 아빠가 얼마나 이주를 싫어하는지.
아빠는 언제든지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겠지.
감자가 땅을 밀어내고
자리 자리를 차지해가는 그런 긴장과 이완,
그리고 그 크기는 나의 생각이야.
밤 냄새가 무서워 마루를 통통 구르며 뛰어가 아빠 이불속에 시린 발을 밀어넣으면
아빠는 깜짝 놀랐지.
오빠는 오른쪽, 나는 아빠의 왼쪽에 나란히 엎드려
아빠 책을 보았어.
공항으로 가는 버스에 오를 거야.
아빠, 너무 걱정하지 마.
쓰러지는 거들도, 일어서는 것들처럼
다 균형이 있다는 것을 나도 알아가게 될 거야.
아빠, 삶은 마치 하늘 위에서
수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는 바람 같아.
안녕, 피츠버그.
내 생의 한 페이지를 넘겨준 피츠버그,
그리고 그리운
아빠.
262p
사람들은 왜 모를까 - 김용택
이별은 손끝에 있고
서러움은 먼데서 온다
강 언덕 풀잎들이 돋아나며
아침 햇살에 핏줄이 일어선다
마른 풀잎들은 더 깊이 숨을 쉬고
아침 산그늘 속에
산벚꽃은 피어서 희다
누가 알랴 사람마다
누구도 닿지 않은 고독이 있다는 것을
돌아앉은 산들은 외롭고
마주보는 산은 흰 이마가 서럽다
아픈 데서 피지 않는 꽃이 어디 있으랴
슬픔은 손끝에 닿지만
고통은 천천히 꽃처럼 피어난다
저문 산 아래
쓸쓸히 서 있는 사람아
뒤로 오는 여인이 더 다정하듯이
그리운 것들은 다 산에 있다
사람들은 왜 모를까 봄이 되면
손에 닿지 않는 것들이 꽃이 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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