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 샤오보에게
그대 운명은 바람과 같아
이리저리 나부끼며
구름 속에서 노닌다
나는 그대의 짝이 되길 환상했지만
어떤 집을 꾸려야
그대를 잡아둘 수 있을까
벽은 그대를 질식시킬 거야
그대는 바람일 뿐, 바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여태껏 내게 얘기해주지 않았다
바람이 불어오면 난 눈을 뜰 수 없고
바람이 가버리면 먼지만 가득하다
황혼
나는 황혼이 내려 앉는
이 시각을 좋아한다
주위의 모든 사물이
아련한 빛 속에서
온갖 모습을 드러낸다
정오의 햇볕과
깊은 밤 적막의 눈물은
이처럼 풍부하거나 이처럼
출렁이지 않는다
가로등은 아직도 켜지지 않았고
석양은 갓난아기처럼 유약하다
그렇게 마음을 쓰지 않는 것처럼
뼈에 사무치게 이 시각까지 기다려왔다
나는 느릿느릿 다가오는 이 순간에
하늘이 어두워지기 전에
조용히 마지막 담배 한 개비를 피운다
점점 거대해지는 그림자는
무겁게 주위를 압박해오고
언어는 혼돈 속에서 잘게 부서진다
겉모습 밖에서
그 새는 하늘 높이
비상하고 있다
유자
나는 굵고도 동그란 유자를 갖고 논다
황금색 동그란 것이
쌉싸래한 맑은 향기를 뿜는다
작은 칼로
아주 두꺼워 보이는 껍질을 쪼갤 수 있다
무언의 고통 속에서
나는 전율하기 시작한다
고통스런 생활을 느낄 수 없는 건
아무도 따주지 않는 과일과 같다
그걸 기다리는 건 오직 부패 부패
나는 정말 이 유자가 되고 싶다
칼로 베어지고 손으로 벗겨지고 이빨에 씹히며
차라리 고통 속에서
편안히 죽고 싶다
나의 썩어가는 육체에서
꿈틀대는 구더기를 보고 싶지 않다
온 겨울 내내
나는 똑같은 일을 반복할 수 있다
하나 하나 유자 껍질을 벗기며
사망 속에서 영양을 섭취한다
219p.
길고 긴 호흡으로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일상을 견디며 끝까지 싸워나가야 한다. 이 싸움은 그야말로 '우공(愚公)'이 산을 옮긴다는 넉넉한 여유 [愚公移山]와 '정위(精衛)' 새가 나뭇가지를 물어와 바다를 메운다는 끈질긴 정신 [精衛塡海]에 바탕을 두지 않으면 안 된다. 황석영의 소설 『객지』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 동혁은 "꼭 내일이 아니라도 좋다."라고 자신의 마음을 다잡는다. 그 내일이 바로 내일이 아니라 10년 아니 20년 30년 100년 이후의 내일이더라도 사람이 사람을 짓밟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정의로운 사회라면 오늘 류샤와 사오보의 사랑과 항쟁은 인류의 가슴 속에 오래 오래 살아 있을 것이다.
'예술 > 文藝'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래도, 사랑 - 정현주 (사진 추가) (0) | 2018.06.22 |
---|---|
해질 무렵 - 황석영 (사진 추가) (0) | 2018.06.12 |
아디안텀 블루 - 오사키 요시오 (0) | 2018.04.27 |
그대 뒷모습 - 정채봉 (*사진) (0) | 2018.02.09 |
세로토닌 100% 활성법 - 아리타 히데호 (0) | 2017.12.31 |
말의 품격 中 (이기주) (0) | 2017.09.16 |
나는 오랫동안 그녀를 꿈꾸었다 - 티에리 코엔 (0) | 2015.12.08 |
창천속으로 - 정현종 (0) | 2015.07.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