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 중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심연이 존재한다. 깊고 어둡고 서늘한 심연이다. 살아오면서 여러 번 그 심연 앞에서 주춤거렸다. 심연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건너갈 수 없다."
나를 혼잣말하는 고독한 사람으로 만드는 게 바로 그 심연이다. 심연에서, 거기서, 건너가지 못한 채, 그럼에도 뭔가 말할 때, 가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심연 저편의 당신을 향해 말을 걸 때, 그때 내 소설이 시작됐다.
나의 말(言)들은 심연 속으로 떨어진다. 그래서 나는 다시 써야만 한다. 깊고 어두운 심연이, 심연으로 떨어진 무수한 나의 말들이 나를 소설가로 만든다. 심연이야말로 나의 숨은 힘이다.
가끔, 설명하기 곤란하지만 나의 말들이 심연을 건너 당신에게 가닿는 경우가 있다. 소설가는 그런 식으로 신비를 체험한다. 마찬가지로 살아가면서 우리는 신비를 체험한다. 두 사람이 서로 손을 맞잡을 때, 어둠 속에서 포옹할 때, 두 개의 빛이 만나 하나의 빛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듯이.
희망은 날개 달린 것, 심연을 건너가는 것, 우리가 두 손을 맞잡거나 포옹하는 것, 혹은 당신이 내 소설을 읽는 것, 심연 속으로 떨어진 내 말들에 귀를 기울이는 것.
부디 내가 이 소설에서 쓰지 않은 이야기를 당신이 읽을 수 있기를.
'예술 > 文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천속으로 - 정현종 (0) | 2015.07.02 |
---|---|
어느새 - 최영미 (2) | 2014.09.25 |
무늬 - 류근 (0) | 2014.06.11 |
흉몽 - 권지숙 (0) | 2014.05.25 |
견인 - 이병률 (0) | 2014.02.03 |
궁금한 젊은이 - Wilhelm Müller (0) | 2013.07.11 |
다섯 연으로 된 짧은 자서전 - Portia Nelson (0) | 2013.04.11 |
허수아비 (0) | 2013.03.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