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시절 문·이과를 택하는 것은 내게 너무나도 쉬웠다. 예체능을 제외하고 좋아하는 과목은 국어, 영어, 과학, 사회였고 싫어하는 과목은 수학이었기에 당연 문과를 선택했다. 성적도 좋아하는 과목 순이었기에 너무나도 쉬운 선택이었다. 그러다 고1 학기말쯤이었던 것 같다. 농구를 하다 손가락을 심하게 삐었다. 비일비재한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정도가 심해 오른손 검지손가락 주위로 얼마간 깁스를 해야했다. 그러다 전혀 뜻밖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수학시간이었다. 선생님께서 개념 설명을 하시고 해당되는 교과서 문제를 풀라고 하셨다. 오른손으로 펜조차 쥘 수 없었던 나는 잠시 교과서를 훑어내려보다 심심했는지 이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고개를 파묻고 열심히 펜으로 숫자를 써내려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가득했다. 그순간 미칠듯이 숫자를 써내려가고 싶다는 강한 충동이 일었다. 그뒤로 깁스를 풀 때까지 머릿속에는 온통 펜을 들고 숫자를 꾹꾹 써내려가고 싶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얼마뒤 깁스를 풀고 나는 미칠듯이 숫자를 써내려갔다. 모순적이게도 내게는 숫자를 써내려가기 위해서 수학 문제들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는 순간의 충동을 넘어 지속됐다. 이러한 갈구는 겨울방학이 되고 수1을 준비하며 여러 수학적 증명 과정을 써내려가는 것에 매력을 느끼는 것으로 이어졌다. 놀랍게도 이는 수능을 칠 때까지도 이어졌다. 어찌보면 중요과목이라 불리는 것들 중에 가장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싫어하고 소홀히 했던 것인데 결과적으로 수능 백분위가 가장 높은 과목이 되어버렸다. 운이 좋았다라고 말하고 싶다.
며칠전부터 감기가 걸렸다. 이틀 뒤에 레슨이 있었기에 그 전까지 어떻게든 나아보려고 밥도 쳐묵쳐묵하며 비타민에다 프로폴리스에다 귤에다 따뜻한 물에다 목티까지, 별의별 짓을 다하며 잠을 퍼잤다. 다행히 레슨이 있던 날 그래도 조금은 나아진 것 같아 레슨을 받으러 갔다. 레슨을 받기 위해서는 1시간 가량 지하철을 타고 가야한다. 그런데 이 날 따라 지하철 에어컨 바람이 더욱 건조하고 차갑게 느껴졌다. 결국 레슨 장소에 도착했을 때 목 상태는 악화되어 있었고 머리도 아프고 온 몸에 힘도 없었다. 레슨을 받는데 젠장할 전혀 느낌을 잡을 수가 없고 10분 했을 뿐인데 식은땀이 쭉쭉 흘렀다. 선생님께서도 컨디션이 너무 안 좋다고 생각하셨는지 다음 노래 가사 공부를 하자고 하셨다. 레슨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레슨에서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과 건강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에 화가 치밀었다. 그리고 코까지 막히고 머리가 아파와 짜증이 더해갔다. 그렇게 한참을 인상 쓰고 있다가 우연히 한 전화를 받았고 서로의 꿈에 대한 얘기를 나누게 됐다. 통화를 마치고 나는 한 가지 생각 밖에 없었다. 노래하고 싶다. 제발 하루, 한시라도 빨리 노래하고 싶다. 아 미칠듯이 노래하고 싶다. 이 생각 밖에 없었다. 순간 예전의 그 수학시간이 떠올랐다. 그래 이건 좋은 기회다. 당장에는 연습을 못하고 그래서 레슨도 망쳤지만 잘만하면 조금은 나태한 자신에게 전환의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병원을 다녀왔고 그 뒤로 오늘까지 이틀이 지났다. 여전히 완쾌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노래 부르고 싶다는 마음은 강한 갈증처럼 커져가고 있다. 열심히 밥과 약을 챙겨먹으며 충분한 숙면을 취하고 있다. 완쾌되는 순간 이제 새로운 시작이다. 이 타는 듯한 갈증이 언제까지 지속될 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그저 순간의 감정에 충실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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