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무라면
나는 수직의 운명에 목이라도 맨듯
좌우로 한치의 오차도 두지 않고
똑바로 선 자세로 자라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우선 그대가 오는 길목이 잘 보이도록
약간 높은 언덕을 고르고
그 언덕 위에 뿌리를 내릴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올 때마다
그대의 발자국 소리에 마음을 기울이고
그 마음을 따라 몸을 기울일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직립의 자세를 버리고
그대가 오는 곳으로 기울어져 자라는 나무가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너무 몸을 기울이진 않을 것이다.
몸을 너무 기울이면
그대를 기다린다기보다
그대를 노골적으로 탐하는 자세가 되고 만다.
그러면 그대에 대한 내 마음이 바깥으로 쏟아진다.
마음이 바깥으로 쏟아지고 나면
그대의 발길이 내 마음으로 어지럽혀지고 만다.
알고 보면 마음이 쏟아질 때
그대도 함께 쏟아져 버린다.
그러니 나는 마음이 쏟아지지 않을 만큼
약간만 몸을 기울일 것이다.
그대가 어느 곳을 걸어가다
그대를 향하여 아주 약간 기울어진 언덕 위의 나무를 만났다면
그것은 나무가 아니라
그대를 향하여 기울어진 내 마음이다.
내 마음은 그대를 향하여 쏟아지진 않으나
그대가 주는 눈길로
조금 덜어낼 수 있을 만큼 기울어져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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