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일째 : 수요일
분주한 아침이었다. 넉넉히 시간을 잡고 별 생각없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머리를 말리고 옷을 꺼내보는데 아무래도 단정하게 입어야 할 것 같다. 옷걸이까지 빼 든 티셔츠를 던져버리고 흰색 셔츠를 꺼내왔다. 살이 빠지며 체형 또한 변한건지 입던 셔츠가 영 이상하다. 7개 가량 되는 셔츠를 한번씩 다 걸쳐봤다. 그 중 하나가 꽤 잘 맞았는데 오랜 기간 쳐박혀 있어서인지 누렇게 색이 바래 있었다. 깃 부분을 살짝 씻어 드라이기로 말렸다. 어느새 시간은 꽤 촉박해졌다. 학교에 도착하기로 한 시각은 10시였고, 집을 나선 시각은 9시 30분이 넘은 시간이었다. 걸음을 재촉했음에도 학교의 위치는 생각보다 멀어 10시를 조금 넘겨서야 간신히 도착할 수 있었다. 함께 교육봉사를 하는 선생님과 1-2반 교실앞에서 대기했다. 딱히 긴장도, 별다른 느낌도 없었다. 담임선생님의 시간이 끝나고 처음으로 교실에 들어섰다. 함께 온 선생님은 이전에 한 번 교육봉사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첫 날임에도 아이들을 능숙하게 이끌었다. 나는 뒷짐을 지고 계속 서있다 성악 전공이라는 이유로 노래를 한 번 했다. 생각보다 아이들은 크게 박수를 쳤고 노래 소리가 너무 컸는지 뒤따라 뒷반도 함께 박수를 쳐왔다. 아이들과 합창대회에 함께 할 곡목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마쳤다. 그날은 그게 다였다.
# 2일째 : 목요일
전날 주도적으로 아이들을 이끌던 선생님께서 늦으셨다. 다른 선생님 한 분과 교실로 먼저 들어갔다. 합창 영상을 보여주기 위해 유튜브를 검색하며 아이들에게 <안녕>이라고 말했다. <안녕하세요>라는 밝은 톤의 대답이 합쳐지며 크게 들려왔다. 곡목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하고 학교 지하 1층의 체력단련실로 내려갔다. 여자 선생님과 오늘은 먼저 파트를 나누기로 결정하고 높은 파트에 지원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지 물어봤다. 선뜻 나서는 학생은 없었고 고음 잘 나는 사람, 변성기가 아직 오지 않은 사람, 노래방 자주 가는 사람 등 별별 수식어를 갖다 붙여가며 몇 명씩 테너 파트를 뽑아갔다. 그 아이들에게 몇 명씩 더 데리고 오라고 하자 1/3이 조금 넘는 학생들이 모이게 됐다. 다른 한 분의 선생님께서도 마침 도착하셨고 본격적으로 <카레> 합창 연습에 들어갔다. 피아노가 없는 상황이었기에 대충 선생님들이 첫 음을 잡고 앞에서 시범을 보이면 아이들이 따라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연습은 10시-12시까지로 잡혀있었고 중간에 쉬는 시간을 한 번 가지고 나머지는 모두 연습에 몰두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아이들은 잘 따라와줬다. 전날보다 많은 아이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 3일째 : 금요일
두 분의 선생님께서 모두 늦으신다고 했다. 오늘 역시도 10시-12시에 걸쳐 연습이 잡혀있었다. 이 고등학교는 학교 특색사업으로 매년 여름방학에 교내 합창대회를 개최한다. 그 때문인지 정규수업을 합창연습으로 대체하는 것도 가능해보인다. 오늘은 음악실에서 한 시간 가량 먼저 연습을 시작했다. 쉬는시간이 되어 담임선생님을 뵙고 음악실로 먼저 가 있었다. 교탁으로 보이는 길쭉한 탁자에 기대어 서서 음악실로 들어오는 아이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이라고 하자 <안녕하세요>라며 쑥스러운듯 고개를 숙이며 들어왔다. 어제 처음으로 연습을 해봤는데 어땠는지, 어려운 점은 없었는지와 같은 얘기를 몇마디 하다가 바로 연습에 들어갔다. 배운 곳까지 한 번 다같이 불러본 뒤 다른 선생님들이 오실 때까지 잘 안 되는 부분을 계속 연습했다. 아이들이 바닥에 앉아있을 때는 잘 몰랐는데 그들이 책상에 앉아 함께 노래하고 대화하자 그들의 시선과 표정이 더욱 잘 들어왔다. 4교시는 어제와 같은 체력단련실에서 진행되었다. 아직까지 안무는 들어가지 않았으며 조금 더 정확한 음정과 화음부분에서의 밸런스를 잡으려고 노력했다. 노래의 진도는 거의 끝까지 나갈 수 있었다. 특히 후렴부분과 솔로파트를 연습할 때 아이들은 꽤나 즐거워했다. 전날보다 많은 아이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고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몇몇은 여전히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 4일째 : 월요일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왜인지 두 분의 선생님과 연락이 닿지 않았다. 3교시는 아고라 광장, 4교시는 음악실에서 연습이 진행되었다. 3교시가 끝날 때쯤 여자 선생님께서 오셔서 테너와 베이스 파트로 나누어 연습을 했고 4교시는 또다시 혼자 연습을 진행했다. 2시간 가량을 하다보니 막바지에는 자꾸만 한숨이 나왔다. 헤아려보니 합창대회까지 생각보다 기한도 얼마 남지 않았고 주말을 지나온 아이들은 지난 금요일 연습 전 수준으로 리셋 되어 있었다. 비 때문인지 아이들도 평소보다 많이 쳐져 있었다. 4교시 연습에는 음악 선생님께서도 몇 번 들르셨는데 정말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불쌍하게 쳐다보시는 듯 했다. 조용히 시키고, 피아노 치고, 말하고, 노래하고를 반복하다보니 진이 다 빠졌다. 수업의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선생님도 두 시간 동안 하다보니 힘들다, 같이 열심히 좀 해보자는둥 한탄 아닌 신세한탄까지 했는데 종이 울리자 갑자기 일어서려는 모습에 맥이 빠져버렸다. 되풀이 하고싶지 않은 시간이었고 전부 다 털어버리듯 학교의 내리막을 걸어내려왔다.
# 5일째 : 화요일
55분까지 모이기로 했고 30분이 다 되어 집을 나섰다. 빨리 걸을까하다 날도 덥고 두 분 선생님도 일찍 와 계실것 같아 그냥 천천히 걸었다. 가는 내내 잡생각이 자꾸만 떠오르고 자꾸만 누군가 뒤에서 잡아당기는 것 같아 결국 15분 가량이나 늦었다. 연습을 진행하고 계신 선생님들쪽으로 조용히 가려했는데 아이들이 먼저 인사를 해왔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응, 안녕>이라고 답하며 아이들의 얼굴을 보자 거짓말처럼 기분이 모두 좋아졌다. 오늘은 본격적으로 다함께 안무연습에 들어갔다. 노래의 디테일한 화성을 살리기보다는 전체적인 분위기와 퍼포먼스에 집중하기로 했다. 안무가 들어가니 아이들은 평소보다 집중을 잘했다. <카레>라는 노래가 가진 즐거움을 아이들을 통해서 느낄 수 있었다. 안무와 노래를 하며 즐거워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체육관에서의 연습을 마치고 아고라 광장으로 이동했다. 잠시 파트 연습을 하다 다함께 안무와 함께 맞춰봤다. 정규 수업외에 30분가량 추가 연습을 했고 담임선생님께서도 들르셨다. 생각보다 열심히 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선생님께서도 매우 흐뭇하게 바라보셨다. 지난 연습 때 마냥 막막하기만 했던 답답함이 뭔지 모를 설렘으로 바뀌어갔다.
+ 밤
지난 낮 연습 때 찍었던 영상을 단톡에 올려줬다. 아이들은 지난 연습이 매우 만족스러웠는지 다들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우리의 처음 목표는 인기상이었으나 아이들은 이미 그 이상을 넘보고 있었다. 낮의 연습을 마치고 선생님들과 화음은 포기합시다며 체념 아닌 체념을 하며 소탈하게 웃으며 내려왔는데 아이들은 단톡방에서 심지어 노래마저도 너무 잘하는 것 같다며 스스로에게 칭찬일색이었다. 그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 단톡방의 대화가 나름 활발해졌는데 그러다 한 아이가 <선생님들 우리 이름은 다 아시죠?>라고 말했고 뒤이어 <아마 아실거야>라는 글들이 올라왔다. 뜨끔했고 <선생님도 이름 빨리 외울 수 있도록 노력해볼게...>라며 쑥스럽게 답했다. 동기 중 한 명이 자기는 벌써 자기 반 학생의 이름을 다 외웠다고 말한 것 까지 떠올라 더 심란했다.
# 6일째 : 수요일
합창대회 전날이었다. 우리 반은 1시에 리허설이 잡혀있었다. 10분 정도 지각했고 도착하자 다른 두 분의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막 리허설을 시작하고 있었다. 전날의 패기는 어디로 간건지 처음으로 무대에 선 아이들은 생각보다 많이 부끄러워 했다. 리허설이 끝나고 아고라 광장으로 이동했다. 남자 선생님께서 조금전 리허설에 대해 강하게 코멘트를 하셨다. 가끔 선생님께서 열을 올려 말씀하실 때면 아이들의 표정에서는 꽤나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이제는 사실상 더이상 무언가를 더 잘하려 하기보다는 기존에 해오던 것을 신나고 열정적으로만 하면 충분했다. 이 날은 노래와 안무 연습을 그다지 많이 하지 않고 충분히 쉬어가며, 연습보다는 아이들과 대화를 많이 하며 시간을 보냈다. 남자 선생님께서 주로 대화를 이끄셨고 학교를 오며 아무래도 더위를 먹은듯한 나는 하루종일 넋이 나가 있었다. 아이들의 이름을 한번 외워보자 마음먹었던 지난밤의 결심은 떠오르지도 않고 그저 띵한 머리를 부여잡고 계속 멍을 때렸다. 여러번 느끼지만 특히나 교사는 정말 체력이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다함께 안무와 노래를 맞춰볼 때 아이들은 훌륭히 잘해줬고 대회 당일도 이 정도만 하면 충분할 것이라고 선생님들끼리 얘기했다.
# 7일째 : 목요일
드디어 합창대회 당일이었다. 오전 11시에 다함께 리허설이 잡혀있었다. 각 반 합창의 반주는 그 반의 피아노 잘 치는 학생들이 주로 맡았는데 여의치 않으면 선생님들께서 반주를 대신 했다. 우리 반은 남자 선생님께서 반주를 맡기로 하셨다. 11시에 곧바로 체육관으로 갔으나 2반 아이들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카톡에는 늦을 것 같다는 다른 선생님들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교실로 가 아이들을 이끌고 체육관으로 향했다. 왜인지 선생님들께서는 계속 연락이 되지 않으셨다. 1시간 정도가 지난 12시 정도에 남자 선생님께서 오셔서 리허설을 해볼 수 있었다. 한 시간이나 기다린 탓인지 아이들은 터뜨리고 분출하듯 열정적으로 춤추고 열정적으로 노래했다. 이 기세만 이어간다면 다들 기분 좋은 마음으로 본 연주에 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선생님들을 기다리는 한 시간 동안 아이들에게 더 관심을 가지고 한 명이라도 이름을 더 외워보려 노력했어야 했지만 그저 나는 너무 지쳐있었다. 날씨에 지치고 체력에 지치고 기다림에 지치고 전날 개인적인 연습에도 지쳐있었다.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자꾸만 들었다.
점심을 다함께 먹고 드디어 합창대회가 시작되었다. 우리반 아이들은 교복 차림에 모두 앞머리를 2:8 혹은 올빽으로 넘겨버리기로 했다. 우리의 컨셉은 진지함 속의 코믹이였다. 두 번째 순서가 끝이 나고 드디어 2반 아이들이 대기하러 나갔다. 커튼이 올라가고 단상에 줄맞춰 서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아이들은 리허설만큼이나 열정적으로 무대에 임했고 사람들의 반응까지 더해지자 더욱 신이 난듯 열심히 했다. 아이들의 영상을 촬영하느라 뒤쪽의 다른 반 아이들과 섞여 있었는데 우리반의 공연이 즐거워보였는지 자신들도 카레를 같이 하고 싶다는 얘기가 종종 들려왔다. 우리 반은 결국 처음의 목표였던 인기상을 거머쥘 수 있었다. 정말로 기뻐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다른 반의 공연까지 모두 보고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교실로 돌아왔다. 먼저 가신 여자 선생님을 제외하고 남자 선생님과 각자 아이들에게 마지막으로 아이들에게 하고싶은 말을 전하고 교실을 나섰다. 교실을 나서며 자꾸만 뒤돌아서 아이들과 인사를 했는데 내가 이런 아쉬움을 가지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고마웠다. 난 그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좀 더 많이 했어야 했다. 일주일간의 교육봉사는 그렇게 끝이 났다.
'36.5 > 2호선 건대입구역'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월간음교 Vol.4 (0) | 2016.02.01 |
---|---|
추계음악회 (2015) (2) | 2015.10.31 |
월간음교 Vol.3 (0) | 2015.07.26 |
음이온 콘서트 (2015) (1) | 2015.05.20 |
춘계음악회 (2015) (0) | 2015.05.18 |
학위수여식 (2015) (2) | 2015.02.24 |
건국 심포니 정기연주회 (26th) (0) | 2014.11.26 |
추계음악회 (2014) (0) | 2014.11.02 |